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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2012.01.11 03:51
전쟁을 통해 성장한 초기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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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iloam-church.org/lecture/juje/juje22.htm일반전쟁을 통해 성장한 초기 이슬람
이광호 목사
[시작하는 말]
최근에 이르러 '이슬람'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등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 민족과 무관한 종교가 아니었으며 1950년대 초 한국전쟁이나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이슬람은 우리 주변에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실제보다 가까이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걸프전쟁과 최근에 있었던 미국 뉴욕에서의 테러사건,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미국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슬람이 우리의 관심을 부쩍 끌고 있다.
이슬람과 함께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라는 용어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학교교육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위의 문구에서 말하듯이 이슬람은 과연 호전적인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다양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슬람에서는 그 말을 들으면 펄쩍 뛴다. 이슬람은 결코 호전적인 종교가 아니라 평화의 종교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 가운데는 이슬람을 호전적인 종교로 선전한 것은 중세의 기독교인들이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처음 인물이라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현재의 이슬람이 호전적인 종교냐 아니면 평화의 종교냐 하는 관심보다 초기의 이슬람이 많은 전쟁들을 통해 성장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즉 이슬람의 태동기에 있었던 숱한 전쟁들이 이슬람을 성장시킨 직접적 배경이 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이슬람의 호전성 여부를 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초기 이슬람의 성장과정에 전쟁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살펴봄으로써 이슬람 선교에 관심을 가진 성도들이 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지식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이슬람 공동체의 형성]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원래 호전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무함마드 일행이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Hijirah)해 가기 전 까지만 해도 무함마드에게서 호전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든다. 당시의 무함마드는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었으며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당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쿠라이쉬(Quraish)족으로 부터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서서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가게 된다. 결국 그들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해 갔을 때는 생존을 위한 집단적 힘이 필요했으며 무함마드는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생존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된다.
메디나 이주를 전후해 당시 메카와 메디나에는 무함마드의 신앙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독립된 형태의 종교를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교를 모체로 한 아랍 색채가 강한 유일신교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종교에 ?이슬람?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메디나 이주 이후의 일이다.
메카에서 무함마드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해 간 추종자들(Muhajirun)은 유대교적 유일신 신앙에 투철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낯선 메디나로 이주하여서는, 그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동일한 신앙 추종자들(Ansar)의 도움을 받아 살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거기에서 메카출신과 메디나 출신 추종자들에게 이슬람 형제애(Ummah)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아 그들 사이에 알력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메카출신의 추종자들과 메디나 출신의 추종자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의 기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메카출신의 이주자들은 자신들이 더 신앙이 투철한 그룹으로 인식하였으며, 메디나 출신 추종자들은 그들을 받아들인 자신들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함마드의 추종자들과 당시 메디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유대교를 유일신을 신봉하는 형제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 반해 유대교인들은 무함마드의 종교를 이단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유대인들로부터 지원을 기대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외면하여 돕지 않았다. 결국 무함마드와 유대교는 결별하게 되어 서로 원수지간이 된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을 기도방향(Qiblah)으로 정하고 있던 무슬림들이 유대교와 결별이후 기도 방향을 메카로 바꿈으로써 독자적인 종교그룹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의 역할과 알라의 은총]
그런 정황 가운데서 무함마드는 주변의 적들과 여러차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루게 된다. 유대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이슬람 공동체는 독자적인 힘을 가져야만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과 약탈이 빈번한 사막의 세계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힘?은 공동체의 기초기반이다. 결국 그 힘은 되풀이되는 크고 작은 전쟁들을 통해 키워져 갔다.
무함마드는 전쟁의 승패를 종교에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추종자들을 종교의 틀 속에 붙들어 둘 수 있었다. 무함마드의 군대가 메카로 입성하기 전까지 수많은 전투들을 치렀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세 번의 전투를 이슬람 성장을 위해 있었던 중요한 전쟁으로 이해한다. 624년의 바드르(Badr) 전투, 625년의 우후드(Uhud)전투, 그리고 627년에 있었던 아흐잡(Ahjab) 전투가 그것이다.
바드르 전투는 이슬람이 독자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바드르 전투가 있기 전 이슬람 추종자들에게는 내부적 분란과 더불어 심각한 외부적 위협이 있었다. 그러나 바드르 전투에서의 대승리는 내부적 결속과 함께 외부에 자기 세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동기를 부여했다. 바드르 전투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그 전투를 ?알라의 은총?과 연결지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직 세력이 약하던 이슬람 집단이 당시 최강의 세력집단인 쿠라이쉬 족에 대항하여 승리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그 전투에서의 승리를 알라의 은총으로 돌렸으며 알라가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추종자들에게 설파하여 교육시켰던 것이다. 물론 주변의 외부세력에게도 유일신 알라의 은총이 이슬람에게 임하고 있음을 선전했다. 이는 나중 아라비아 반도가 단시간에 이슬람화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보잘 것 없는 약체로 평가되던 무함마드의 군대에 대패한 쿠라이쉬족은 그 부끄러운 전투의 패배를 그냥 인정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보복전쟁이 일반적이었으며 더구나 약자에 의한 패배의 부끄러움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듬해 쿠라이쉬족 군대는 이슬람 세력의 정벌에 나섰고 그때 우후드 전투에서 무함마드의 군대는 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패배가 이슬람의 성장을 위해 도리어 도움이 된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점은 무함마드가 그 전투에서 패배를 추종자들의 신앙에 호소함으로써 종교적으로 적절히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즉 우후드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알라에 대한 신실한 신앙심의 부족과 지난번 바드르 전투에서 승리에 대한 교만함 때문에 알라가 도움을 주지 않고 패배케 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의심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 때는 이미 무함마드가 유일신 신앙을 전파하는 예언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후에 있었던 아흐잡 전투에서 승리는 그야말로 알라의 대은총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아흐잡 전투에서 승리는 기존의 메카 세력을 몰락하게 했으며 이슬람을 추종하는 아랍 신흥종교인들에게는 알라의 능력과 은총을 맛보게 하는 확실한 계기가 된다. 이렇게 하여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전쟁들을 통해 종교적 자기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무함마드의 군대는 적에게 승리했을 때 그것을 알라의 은총으로 받아들였고 패배했을 때도 그것을 알라의 섭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전쟁들은 이슬람이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슬람의 아라비아 통일과 세계를 향한 도약]
아흐잡 전투로 인해 628년에 맺어졌던 ?후다비야 맹약?으로 인해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메카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 평화조약은 이듬해 이슬람 군대가 메카를 무혈 정복하는 전단계 역할을 한다. 629년 메카를 정복한 이슬람 세력은 메카의 카바신전을 확보함으로써 종교적 기반을 확고히 하여 전 아라비아 반도를 쉽게 장악하게 되었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에도 이슬람의 정복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군대의 다음 목표는 기독교, 즉 기독교 제국인 동로마제국이었다. 당시 세속화 된 로마제국의 기독교 정부는 백성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참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던 동로마제국의 일반시민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횡포를 실감하고 있던 터였다. 이슬람은 그런 지역을 정복하면서 총칼을 앞세우기 보다 평화를 내세우며 나아갔다. 그들은 연약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피정복지 시민들에게 세금감면과 더불어 유일신 알라 앞에서의 평등한 삶을 약속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이슬람 세력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슬람은 칼을 앞세운 폭력자가 아니라 도리어 평화의 군대였다. 그렇지만 사막의 신흥이단 세력이 칼을 앞세워 무섭게 돌진해 들어오는 것을 본 동로마제국의 기득권층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해서 이슬람은 타락한 기독교를 발판으로 하여 전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진군해 갔던 것이다.
[맺음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슬람은 발생시 전쟁을 통해 성장한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초기에 있었던 다양한 전쟁들이 그들에게 끼친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단순히 호전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돌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의 이슬람을 경험하며 그들의 초기단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도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 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보고 호전적이라 하는 데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문제는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려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할 위치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들은 복음을 증거하려는 자들에게 많은 거침돌이 되고 있다. 최근 10여년 동안 있었던 여러 세계적 정세들이 그렇다. 많은 이슬람 학자들은 걸프전쟁이 서구의 기독교와 중동의 이슬람 사이의 종교전쟁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으로 인해 일부 서구인들은 이슬람을 적대적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에 뒤따른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지금 진행중인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누가 뭐라 해도 종교가 그 중심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기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에게 기도하고 이슬람을 믿는 중동의 무슬림들은 알라신에게 기도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하는가 하는 것은 차치하고 신앙과 기도의 대상이 상이한 양 집단 사이에 인명을 담보로 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엄청난 외부적 어려움이 닥친다해도 무슬림들은 여전히 복음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우리의 이웃이다. 전쟁의 현실로 인해 마음 아픈 순간에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이 줄어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 마음은 단순한 정의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한 긍휼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들을 좀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2003, 월간고신 6월호)
이광호 목사
[시작하는 말]
최근에 이르러 '이슬람'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등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 민족과 무관한 종교가 아니었으며 1950년대 초 한국전쟁이나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이슬람은 우리 주변에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실제보다 가까이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걸프전쟁과 최근에 있었던 미국 뉴욕에서의 테러사건,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미국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슬람이 우리의 관심을 부쩍 끌고 있다.
이슬람과 함께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라는 용어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학교교육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위의 문구에서 말하듯이 이슬람은 과연 호전적인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다양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슬람에서는 그 말을 들으면 펄쩍 뛴다. 이슬람은 결코 호전적인 종교가 아니라 평화의 종교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 가운데는 이슬람을 호전적인 종교로 선전한 것은 중세의 기독교인들이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처음 인물이라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현재의 이슬람이 호전적인 종교냐 아니면 평화의 종교냐 하는 관심보다 초기의 이슬람이 많은 전쟁들을 통해 성장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즉 이슬람의 태동기에 있었던 숱한 전쟁들이 이슬람을 성장시킨 직접적 배경이 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이슬람의 호전성 여부를 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초기 이슬람의 성장과정에 전쟁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살펴봄으로써 이슬람 선교에 관심을 가진 성도들이 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지식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이슬람 공동체의 형성]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원래 호전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무함마드 일행이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Hijirah)해 가기 전 까지만 해도 무함마드에게서 호전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든다. 당시의 무함마드는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었으며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당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쿠라이쉬(Quraish)족으로 부터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서서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가게 된다. 결국 그들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해 갔을 때는 생존을 위한 집단적 힘이 필요했으며 무함마드는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생존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된다.
메디나 이주를 전후해 당시 메카와 메디나에는 무함마드의 신앙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독립된 형태의 종교를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교를 모체로 한 아랍 색채가 강한 유일신교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종교에 ?이슬람?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메디나 이주 이후의 일이다.
메카에서 무함마드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해 간 추종자들(Muhajirun)은 유대교적 유일신 신앙에 투철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낯선 메디나로 이주하여서는, 그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동일한 신앙 추종자들(Ansar)의 도움을 받아 살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거기에서 메카출신과 메디나 출신 추종자들에게 이슬람 형제애(Ummah)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아 그들 사이에 알력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메카출신의 추종자들과 메디나 출신의 추종자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의 기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메카출신의 이주자들은 자신들이 더 신앙이 투철한 그룹으로 인식하였으며, 메디나 출신 추종자들은 그들을 받아들인 자신들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함마드의 추종자들과 당시 메디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유대교를 유일신을 신봉하는 형제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 반해 유대교인들은 무함마드의 종교를 이단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유대인들로부터 지원을 기대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외면하여 돕지 않았다. 결국 무함마드와 유대교는 결별하게 되어 서로 원수지간이 된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을 기도방향(Qiblah)으로 정하고 있던 무슬림들이 유대교와 결별이후 기도 방향을 메카로 바꿈으로써 독자적인 종교그룹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의 역할과 알라의 은총]
그런 정황 가운데서 무함마드는 주변의 적들과 여러차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루게 된다. 유대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이슬람 공동체는 독자적인 힘을 가져야만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과 약탈이 빈번한 사막의 세계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힘?은 공동체의 기초기반이다. 결국 그 힘은 되풀이되는 크고 작은 전쟁들을 통해 키워져 갔다.
무함마드는 전쟁의 승패를 종교에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추종자들을 종교의 틀 속에 붙들어 둘 수 있었다. 무함마드의 군대가 메카로 입성하기 전까지 수많은 전투들을 치렀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세 번의 전투를 이슬람 성장을 위해 있었던 중요한 전쟁으로 이해한다. 624년의 바드르(Badr) 전투, 625년의 우후드(Uhud)전투, 그리고 627년에 있었던 아흐잡(Ahjab) 전투가 그것이다.
바드르 전투는 이슬람이 독자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바드르 전투가 있기 전 이슬람 추종자들에게는 내부적 분란과 더불어 심각한 외부적 위협이 있었다. 그러나 바드르 전투에서의 대승리는 내부적 결속과 함께 외부에 자기 세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동기를 부여했다. 바드르 전투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그 전투를 ?알라의 은총?과 연결지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직 세력이 약하던 이슬람 집단이 당시 최강의 세력집단인 쿠라이쉬 족에 대항하여 승리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그 전투에서의 승리를 알라의 은총으로 돌렸으며 알라가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추종자들에게 설파하여 교육시켰던 것이다. 물론 주변의 외부세력에게도 유일신 알라의 은총이 이슬람에게 임하고 있음을 선전했다. 이는 나중 아라비아 반도가 단시간에 이슬람화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보잘 것 없는 약체로 평가되던 무함마드의 군대에 대패한 쿠라이쉬족은 그 부끄러운 전투의 패배를 그냥 인정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보복전쟁이 일반적이었으며 더구나 약자에 의한 패배의 부끄러움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듬해 쿠라이쉬족 군대는 이슬람 세력의 정벌에 나섰고 그때 우후드 전투에서 무함마드의 군대는 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패배가 이슬람의 성장을 위해 도리어 도움이 된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점은 무함마드가 그 전투에서 패배를 추종자들의 신앙에 호소함으로써 종교적으로 적절히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즉 우후드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알라에 대한 신실한 신앙심의 부족과 지난번 바드르 전투에서 승리에 대한 교만함 때문에 알라가 도움을 주지 않고 패배케 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의심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 때는 이미 무함마드가 유일신 신앙을 전파하는 예언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후에 있었던 아흐잡 전투에서 승리는 그야말로 알라의 대은총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아흐잡 전투에서 승리는 기존의 메카 세력을 몰락하게 했으며 이슬람을 추종하는 아랍 신흥종교인들에게는 알라의 능력과 은총을 맛보게 하는 확실한 계기가 된다. 이렇게 하여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전쟁들을 통해 종교적 자기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무함마드의 군대는 적에게 승리했을 때 그것을 알라의 은총으로 받아들였고 패배했을 때도 그것을 알라의 섭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전쟁들은 이슬람이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슬람의 아라비아 통일과 세계를 향한 도약]
아흐잡 전투로 인해 628년에 맺어졌던 ?후다비야 맹약?으로 인해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메카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 평화조약은 이듬해 이슬람 군대가 메카를 무혈 정복하는 전단계 역할을 한다. 629년 메카를 정복한 이슬람 세력은 메카의 카바신전을 확보함으로써 종교적 기반을 확고히 하여 전 아라비아 반도를 쉽게 장악하게 되었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에도 이슬람의 정복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군대의 다음 목표는 기독교, 즉 기독교 제국인 동로마제국이었다. 당시 세속화 된 로마제국의 기독교 정부는 백성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참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던 동로마제국의 일반시민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횡포를 실감하고 있던 터였다. 이슬람은 그런 지역을 정복하면서 총칼을 앞세우기 보다 평화를 내세우며 나아갔다. 그들은 연약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피정복지 시민들에게 세금감면과 더불어 유일신 알라 앞에서의 평등한 삶을 약속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이슬람 세력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슬람은 칼을 앞세운 폭력자가 아니라 도리어 평화의 군대였다. 그렇지만 사막의 신흥이단 세력이 칼을 앞세워 무섭게 돌진해 들어오는 것을 본 동로마제국의 기득권층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해서 이슬람은 타락한 기독교를 발판으로 하여 전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진군해 갔던 것이다.
[맺음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슬람은 발생시 전쟁을 통해 성장한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초기에 있었던 다양한 전쟁들이 그들에게 끼친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단순히 호전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돌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의 이슬람을 경험하며 그들의 초기단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도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 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보고 호전적이라 하는 데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문제는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려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할 위치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들은 복음을 증거하려는 자들에게 많은 거침돌이 되고 있다. 최근 10여년 동안 있었던 여러 세계적 정세들이 그렇다. 많은 이슬람 학자들은 걸프전쟁이 서구의 기독교와 중동의 이슬람 사이의 종교전쟁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으로 인해 일부 서구인들은 이슬람을 적대적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에 뒤따른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지금 진행중인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누가 뭐라 해도 종교가 그 중심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기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에게 기도하고 이슬람을 믿는 중동의 무슬림들은 알라신에게 기도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하는가 하는 것은 차치하고 신앙과 기도의 대상이 상이한 양 집단 사이에 인명을 담보로 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엄청난 외부적 어려움이 닥친다해도 무슬림들은 여전히 복음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우리의 이웃이다. 전쟁의 현실로 인해 마음 아픈 순간에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이 줄어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 마음은 단순한 정의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한 긍휼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들을 좀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2003, 월간고신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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